투영(投影)

2020. 4. 20. 15:32잡담

 

 

 

 

투영(投影)

 

 

 

 

나는 누구인가?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자아를 정의한 수많은 책의 구절들에 나는 그럭저럭 다 동의하는 편이다. 읽어보면 이것도 맞는 것 같고, 저것도 그럴싸하다. 마치 알라신 같달까.

 

너는 누구인가?

나는 홍익대학교 산업디자인과 3학년에 재학 중인 조현서이며, 제품을 전공 중이다. 나의 취미는 ㅇㅇ이고, 졸업 후에는·…. 남들의 질문에는 대답이 술술 나온다. 나는 나 자신을 사람들 앞에서 소개하는 데에 어려움은 없는 편이다. 하지만 그것을 진지하게 ‘나’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급한 대로 포장지만 들어 보이는 격이다. 껍데기만으로도 얼마든지 살아올 수 있었고, 또 내 안으로 깊게 침전되는 느낌을 꺼리다 보니 나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볼 시간은 없었다. 나 자신을 파악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나를 담고 있는 내가, 나 자신을 판단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도무지 신뢰가 가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또 감정적이다. 감정적이라고 해서 부정 판단을 긍정 판단으로 오인하지는 않지만, 판단의 적극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렇기에 이 문제는 너무 어렵다. 나는 종잡을 수 없다.

나는 내 행동 각각의 이유는 말할 수 있을 정도로의 명료함은 지녔지만, 그 행위들의 최종 목적을 묻는 말에는 답할 수 없는 우유부단함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변수가 많은 나 대신, 내 주변으로 눈을 돌려보았다.

내 일상을 이루는 사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의 속성으로 나 자신을 파악하려 한다. 사물을 향한 주관적인 시선에는 나의 지향이 들어있기 때문에 나를 돌아보기에 제격일 것이다.

나의 시선이 꽂히는 곳에는 전부 ‘나’가 담겨있다.

고정된 주변 사물에 의존하여 나를 알아보도록 하자.

 

 

1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좋아한다. ‘얼죽아(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는 신조어는 그 어떤 근사한 철학관이나 좌우명보다도 나를 더 잘 표현한다. 하루에 평균 2잔의 커피를 마시는 나에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단순 기호 식품 그 이상이다. 그것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일련의 과정이 내가 사고하는 행위의 일정 부분과 맞물려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하는 습관이 있을 것이다, 나에게 그건, 테이크아웃 커피 한잔을 마시는 일이다. 정신없는 아침에 마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은 나에게 하루의 시작을 의미한다. 믿거나 말거나, 커피를 마시기 전과 후로 나의 집중도는 큰 차이를 보인다.

그렇다고 내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것은 아니다. 기분을 환기하기에 이만한 것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한잔으로 묵은 생각을 내려보내고, 빈자리에는 총기(聰記) 같은 것이 찬다. 여타의 음료에는 없는 커피의 씁쓸함이, 지난 잠에 취해있는 나의 정신을 바짝 깨운다. 잔이 바닥을 보여도 아쉬울 건 없다. 나머지 시간은 남아 있는 얼음이 함께 해 줄 것이다.

집중력 재고와 기분 환기 이외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나를 감정적인 과잉으로부터 잠재우기도 한다. 얼음을 오독오독 씹는 행위는 마치 명상과도 같아서, 달궈진 치아가 얼음을 만나 성난 마음이 가라앉듯 차분하게 식는다. 한 모금, 들이킬 때마다 커피는 나에게 더 객관적인 시선을 가져다주어, 그 순간만큼은 크로키 시간에 연필로 비례를 어림짐작하는 미술학도의 기분을 느껴볼 수 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으로 내가 얻을 수 있는 일상의 요소들이다. 내 일상을 차지하는 비율이 높다. 이 점에서, 커피는 좋은 가성비를 가진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특히 내가 일을 할 때 두각을 나타낸다. 나는 일을 할 때, 집중력을 끌어올려 한 번에 끝마치는 것을 선호하는데, 아이스 커피는 이런 내게 몰입의 좋은 기폭제가 되어준다. 일의 가성비, 나의 효율도 높여주는 것이다.

 

2

나는 종이 달력을 좋아한다. 그리고 모든 해의 달력을 모은다. 이것은 하루하루를 간직하고 싶어하는 나의 욕망에 기인한다.

‘하루하루를 최고로.’ 내 좌우명 중 하나이다. 이것을 잘 지키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일상은 나의 게으른 본성과 그에 상반된 나의 필요 의지의 투쟁으로 가득하다. 또 나는 지나간 나의 일상을 잊지 않는 것에 집착한다. 사진첩을 정리하거나 인화해서 보관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종이 달력에는, 사진에서 볼 수 없는 나의 일상이 담겨있다. 특별하지 않아 오히려 더 특별한 사소함들이다.

나는 칸이 조금 널찍한 달력을 사서, 나의 할 일과 중요 일정들을 적곤 한다. 플래너와 비슷하지만, 한 달과 연간 일정을 개괄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것은 달력만의 특징이다. 한 해가 지나고 나면 나의 종이 달력은 열두 달 모두 빽빽하게 들어찬다. 일 년을 살아냈음의 성취감, 그것을 간직하고자 버리지 않고 보관한다.

나는 그리고 치열하게 살았던 흔적을 종종 들여다보며, 이렇게 소중한 매일을 잊고 싶지 않아 한다. 내가 누구인지는 잘 모르지만,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내는 것이 최선이고, 그것이 나의 소임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3

나는 계란후라이를 좋아한다. 계란후라이는 미적으로 완벽하다. 나의 오감을 다방면으로 자극하기 때문이다.

먼저, 시각이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계란후라이의 색감과 형태는? 노랑! 동그라미! 얼마나 직관적인가. 하지만 알고 보면 다양한 변주가 가능하다. 세상에 갓 나온 샛노랑부터 푹 익은 진노랑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노랑을 달걀 하나로 관찰할 수 있다. 또한 흰자는, 기름을 따라 흐르며 계란후라이의 최종 형태를 만들어내는 아주 강력한 결정권자다.

둘째로, 청각이다. 계란후라이를 굽는 1~2분은 달걀을 깨는 소리부터, 갓 튀겨지는 소리, 그리고 사그라드는 움직임까지 하나의 완전한 음악이 재생되는 시간이다. 이를 표절한 음원이 있다면 그것이 표절이라 할지라도 나의 재생목록에 넣어두고 싶은 마음이다.

셋째로, 후각이다. 계란 후라이 특유의 냄새가 있다. 이는 라면보다 빠르게 나를 부엌으로 불러내는 향이다. 다이어트 중에도 후라이 냄새 앞에서는 자제력을 잃고 만다.

넷째로, 촉각이다. 나는 보통 바삭하게 탄 가장자리를 선호해, 기름을 양껏 두른다. 그렇기에 기름이 종종 팔 위로 튀어 오르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얼마나 바삭하게 구워지려고, 기름이 튄 높이만큼이나 기대하게 된다.

마지막. 미각은 뭐, 말이 더 필요한가?

 

4

나는 손편지를 좋아한다. 손편지를 쓰는 시간만큼 상대방을, 상대방과 나와의 관계를 깊게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편지를 쓰는 건, 편지지를 고르는 일부터 시작된다. 상대방을 향한 나의 관심, 애정, 그리고 친밀도에 따라 편지지의 크기, 줄 간격과 개수 등이 결정된다. 여백을 차지하는 적절한 양의 일러스트 또한 마찬가지. 편지를 받을 상대를 떠올리며 그가 나의 정성에 합당한 가치가 있는 상대인지, 우리는 문구점 편지지 코너 앞에서부터 큰 고민에 빠지게 된다.

편지지를 구매한 후, 꼭 필기감이 좋은 펜을 준비한다. 펜은 상대방에 대한 나의 마음을 종이 위에 온전히 전달할 수 있어야 하므로, 나에게 익숙한 펜이 좋다. 적당한 무게감을 지닌 펜촉은, 나의 마음을 너무 가볍지만은 않게 담아내는 데에 효과적일 것이다.

첫마디를 땐다. 이 순간은, 내 손이 중력을 가장 크게 받는 시간이다. ‘안녕? 생일 축하해’, ‘ㅇㅇ의 23번째 생일을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머릿속에서 썼다가 지웠다를 반복하며 편지의 첫마디를 읽는 상대방의 모습을 떠올린다. 뒤이어 평소 그와 나의 모습도 떠올려본다. 하고 싶은 말이 생긴다. 입을 대신해 손으로 꾹꾹 눌러 한 자 한 자를 써 내려간다.

이렇듯 손편지를 쓰는 시간은, 상대방과, 동시에 상대방을 생각하는 나의 태도를 돌이켜볼 수 있는 지극히 자기 성찰적인 시간이다. 더 빠르고 효율적인 매체가 존재하기 때문에, 시간을 들여 전달하는 손편지가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5

나는 아이팟 셔플(4세대)을 좋아한다. 이는 삶의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나에게 롤모델같은 물건이다.

나는 정리하는 것을 즐긴다. 의도에 부합하는 것만을 남기고, 정리한다. 필요가 없어진 물건을 평소에 가감 없이 버리는 편이다. 그리고 효용 가치가 낮은 장식품은 구매 자체를 꺼린다.

내 방 내부는 나의 완벽한 계획에 의해 배치가 되어 있다. 적어도 책상 위의 물건들은 나의 계획에 의해 의도적으로 그곳에 배치가 된 것들이다. 제 자리 없이 무단으로 놓인 물건들은 내게 점진적으로 검열당한다. ‘이게 정말 필요한 건가?’재고 후에 존재 이유가 합당하다고 판명이 난 물건들만 살아남는다.

아이팟 셔플은 이러한 나와 닮은 물건이다. 화면조차도 없는 이 물건은, 장난감인지 의심될만한 작은 크기와 단순한 구분 버튼들을 갖고 있다. 극도로‘심플’한 것을 보아하니 애플 사의 전자기기가 맞긴 한데, 당시의 나는 이것의 디스플레이가 없다는 것이 사용성에 있어 큰 결함이라고 생각하였다.

몇 개월을 사용해본 결과, 그것은 내 기우(杞憂)였다. 화면은 없어도 그만이었으며, 아이팟 셔플은 그 점을 고려하여 꼭 필요한 요소만을 남기고 정리된 빼어난 물건이라는 것이 나의 총평이다. 나의 일상에 꼭 들어맞을뿐더러 외적으로 견고하기까지 하여 3년 동안 애착을 두고 사용했었다.

아쉽지만, 이 아이팟은 현재로선 더는 출시가 되고 있지 않다. MP3 시장 자체가 이미 스마트폰에 흡수가 되었고, 셔플 기기가 유선 이어폰에만 호환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스쳐 가는 보통의 전자기기였겠지만, 나에게는 두고두고 의미 있는 물건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다. 사물을 향한 나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애착이 가는 것들에는 나의 성향, 지향 등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 투영되어 있다.

좋아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나의 호(好)는 나 자신을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나의 특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엔 어려움이 많다. 몇 가지 문장으로 추리기에 나는 너무 모호한 사람이라 스스로 모순과 비논리에 빠져버릴 것이다. 명료하게 줄이면 줄일수록 맞지 않는 부분이 커가는 것이 나의 특징이기도 하다. 나를 고정하려는 일련의 시도가 반복될수록 나는 손안에 든 세숫비누처럼 튕겨 나갈 것이다.

따라서 나를 흘러가는 대로 두자.

나는 누구인가?

나도 모른다. 어렴풋이 공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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